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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 2022.03.04

우정과 열정(13)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 &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국내 최고의 정신과 전문의와 신소재공학 박사가 의기투합해 전자약을 세상에 내놨다. 시제품이 아니라 국내 식약처에서 시판 허가를 받은 제품이다. 올해 미국 CES에서 전자약 최초로 혁신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 전자약은 ‘우울의 시대’를 풀어가는 대안으로 뜨고 있다.

 

“2002년 즈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의대 뇌자극클리닉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려고 공항에 들어섰어요. 갑자기 군인들이 날 붙잡더니 벙커 같은 곳으로 끌고 가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민 가방에 넣어 가져온 ‘경두개자기자극술’ 장비를 폭탄으로 오인한 것이죠. 제가 갖고 있던 각종 연구 자료와 논문을 꺼내 몇 시간 동안 설명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월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채정호(61)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과거 기억 한 토막을 꺼내 들려줬다. 실제 그는 2002년 국내 최초로 같은 과 이창욱 교수와 함께 ‘경두개자기자극술(TMS)’을 도입한 사람이다. 우울증·강박증 진료에 말로 하는 정신요법이나 약물치료 외에 뾰족한 치료법이 없던 시절에 도입한 일종의 자기 치료술이었다. TMS는 머리 가까이에 전도 전자기 코일을 놓고 전류파를 흘려서 생긴 자기장을 두개골에 통과시켜 신경세포를 활성화하는 두뇌 자극법이다. 지난 1985년 미국에서 처음 고안된 이후 특히 우울증 치료 효과가 큰 것으로 밝혀져 유럽, 캐나다, 이스라엘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정식 치료법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채 교수는 TMS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2000년 초 세계 최고 수준의 TMS 치료 기관인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의대로 직접 달려가 마크 조지 교수와 공동연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우울증·강박증·운동장애 등 다양한 질환을 대상으로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 우울증처럼 TMS 효과가 잘 알려진 질환에서는 물론이고, 기존의 치료 방법이 효과가 없던 강박장애 환자에게도 의미 있는 효과가 있다는 걸 밝혀냈다. 확신에 찬 채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관련 장비를 한국에 들여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연을 이어갔고, 시제품이었던 전자약 상용화에도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게 국내 첫 시판에 성공한 의사 처방 우울증 전자약인 ‘마인드스팀’이다. 작용기전은 미세한 전기자극을 활용한 ‘경두개직류전기자극법(tDCS)’으로,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저하된 전두엽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임상 결과도 좋았다. 와이브레인은 경증 및 중 등증 우울증 환자 65명에게 마인드스팀의 ‘tDCS’를 6주간 적용했는데,임상 참여자의 57.4%에서 우울 증상이 정상 범주로 돌아왔다. 국제신경정신약물학회 산하 국제 저널에서 발간한 ‘2020년 tDCS 국제 가이드라인’은 마인드 근거 레벨을 ‘A(확실한 효능)’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2020년 국내 최초로 우울증 치료에 단독 요법으로서 식약처 허가를 받아냈다. 채 교수가 와이브레인의 임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첫 케이스였다.

두 사람은 이 제품을 이렇게 설명했다. 채 교수는 “마인드스팀은 집에서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비약물 우울증 치료법”이라며 “우울증 환자의 80%가 6개월 이내 항우울제 치료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마인드스팀은 정신과 의사가 원격으로 환자를 모니터링해 꾸준히 자가 치료를 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2017년 국립트라우마센터도 시범사업과 연구 목적으로 마인드스팀을 도입했다”며 “현재 국내 정신병원 110곳에서 처방 전자약으로 마인드스팀을 사용 중”이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전자약 자체보다 이 약이 주는 더 큰 힘에 주목했다.

 

전자약을 처방해도 원격에서 환자는 관리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이: 그렇다. 단순히 전자약이 아니라 전문 의료진이 원격으로 환자의 증상과 행동을 평가 관리해야 한다. 지난 2월 9일 정신건강의학과 전용 척도검사 관리 자동화 솔루션인 마인드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출시한 이유다. 국내 상당수 정신건강의학과 병의원들은 환자의 증상과 행동평가 척도검사를 종이 검사지로 진행해왔다. 와이브레인은 마인드서비스를 전국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다. 정신질환의 검사, 치료, 모니터링 등 전 과정을 통합해 치료 효율이 높아질 것이다.

채 교수 얘기대로 연구할 게 무궁무진해 보인다.

이: 그렇다. 우리가 개발한 재택 전자약은 디지털치료제 중 3세대 치료제로 분류돼 있다. 알약이나 캡슐 형태가 1세대 치료제이고, 항체나 단백질 등 바이오 의약품이 2세대 치료제다. 사실상 국내에서 와이브레인이 3세대 치료제로는 유일한 허가 사례가 됐다. 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뇌과학 기술 분야에 5년간 6800억원을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할 정도로 전자약 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 확신한다. 앞으로 우리도 우울증, 불면증, 치매, 강박장애, 각종 스트레스 질환 등을 치료하면서 병원과 환자를 전자약 플랫폼 ‘마인드(MINDD)’로 더 끈끈하게 이을 생각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채: 2019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마인드스팀의 국내 임상 결과를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이 심포지엄에서 ‘우울증에서 비침습적 두뇌자극 치료’에 관해 발표했다. 그 무렵 강원도 산불을 겪고 악몽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피해주민 심리치료를 위해 국가트라우마센터 안심버스에 비치된 마인드스팀을 사용했다. 그때 기존 항우울제에 거부감 있는 환자들에게 대안 치료법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2002년 미국 중고장비를 낑낑거리고 끌고 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와이브레인이 마인드스팀을 들고 미국 FDA 판매허가를 기다린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 마인드스팀이 식약처 허가를 받기까지 40번 넘게 임상을 했다. 업계에서 이렇게 단시간에 임상을 많이 하는 회사가 없는데, 우리 취지에 공감해준 채 교수님과 대학병원 연구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2013년 회사를 차렸을 때만 해도 ‘내가 만든 기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공대생 마인드로 무턱대고 뛰어들었지만, 많은 분의 도움으로 가치와 방향을 찾은 것 같다. 덕분에 마인드스팀은 세계 최초로 100% 재택 기반 허가 임상을 완료할 수 있었고, 치매 전자약도 ‘세계 최초’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의료기관과 함께한다면 전 세계 환자에게 최상의 치료 솔루션을 제공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본다.